안동소주와 스카치위스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99년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여러 행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여왕이 우리 전통 생일상을 받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초 영국측은 여왕이 전통 생일상을 받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이 가득 쌓인 생일상이 여왕의 검소한 이미지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측의 설득 끝에 생일상은 받기로 하였지만 축배용 술로 안동소주를 쓰자는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왕이 소주를 마시면 스카치위스키의 경쟁상대를 선전하는 셈이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철저히 챙기는 영국인들의 투철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일화다.
영국은 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함께 세계경제를 주도한 경제강국이었다. 과거 영국이 세계경제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철강, 조선,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이 막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일본 등 신흥 공업국이 등장하면서 영국의 제조업은 점차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무리한 복지정책과 국유화정책에 따른 비효율, 노동조합의 파업, 73년의 오일쇼크 등으로 76년에는 외환위기까지 겪었다. 80년대 들어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기간산업인 제조업의 空洞化와 그로 인한 만성적인 실업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영국정부는 90년대 중반부터 자국산업 보호와 외국자본 유치를 통한 제조업 공동화방지에 발벗고 나섰다. 그중 대표적인 정책이 기획사업지역(Enterprise Zone, EZ)의 설정이다. EZ란 과거 탄광촌이나 노동집약형 산업이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공동화된 지역을 한시적으로 지정하여 입주업체에게 각종 혜택을 부여하는, 이른바 특별공단 지역이다. EZ에서는 법적, 행정적 규제가 최소화되고 각종 세제혜택이 파격적으로 주어지는 등 기업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 안동소주를 마다함으로써 스카치위스키를 지키려는 그들의 철저함이 제조업공동화를 방지하려는 정책에도 스며들어 있다고나 할까?
우리나라도 제조업의 공동화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이미 신발이나 섬유산업 같은 경공업분야는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겨갔고 전기전자 부문도 해외로의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 물론 제조업 비중이 줄어들고 서비스업 비중이 커지는 것이 산업발전의 단계이며, 제조업의 공백을 서비스업으로 메우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비스업도 제조업의 토대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비스업이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는 제조업이 산업의 중추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제조업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우리나라는 제조업 공동화에 따른 충격이 선진국보다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인데도 높은 인건비와 각종 불합리한 규제로 외국기업은 물론 국내기업마저 해외로 내몰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걱정스럽다.
이제는 우리도 제조업공동화 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마련에 나설 때가 되었다. 과감한 규제완화와 세제개편을 추진하고 금융제도를 선진화함으로써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정부와 민간부문의 확실한 역할분담과 기업 고용방식의 변경 등 시장경제체제의 확고한 정착을 통해 국내 기업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해외기업이 적극적으로 유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