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초대석

일본 나고야 여행기

송무학수 2011. 5. 16. 10:45
 






19년 전 나고야 대학병원 연수시절 나를 지도해 주셨던 아와야 교수님께서 많이
아프시다고 한다 .
이번 긴 연휴를 맞이하여 그 교수님 살아 계실 때에 문병도 하고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같이 공부했던 일본인 친구들도 만나도 보고 .
또 당시 가난했던 연수시절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호기심도 가지고
이번 추석 연휴를 맞아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나고야로 떠났다 .

출발날
마눌과 둘이서 부산공황에서 예약된 비행기표를 찾아서 좌석을 받고는
로밍인가 뭔가가 되는 예약했던 공황에서 전화기를 받았는데, ,
크기는 엄청스레 큰데 오로지 전화하거나 받는 기능외는 아무 기능도 안된다고 한다 .
또 폴더도 안되기에 전화기를 쓰고는 반드시 OFF를 확인해야한다나
그렇치 않으면 전화 요금이 엄청 많이 나오는 수가 있다고 하며
마치 무전기 같은 큰 전화기를 내어준다 .
방법들을 가르쳐는 주긴하는데, 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도 않는다,
쓰는법이 쓰여진 책자만을 받아 들고는, 만약 전화기를 분실시 많은 벌금을 내야한다
곳에만 무조건 싸인하고는 황급히 전화기를 받아 나섰다.

마침 연휴라 공황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해 서둘렀더니 무려 2시간이나 너무 일찍 나왔다
그 덕에 공황에서의 기다림이 너무 지루하다 .
몇개도 되지 않는 면세쇼핑 센터를 휙 한번 들러 보는데 3분도 채 안 걸린다.
한 상점에서 일본인 친구들에게 선물 할 자수정 핸드 폰 줄 3 개만 달랑 사고는
책방에 들러 월간지를 하나 사서 읽어가며 시간을 때운다 .

이윽고 시간이 되어 KAL에 탑승하는데 나고야 까지는 비행시간이 1시간 40분 가량이 걸린단다 .
기내에는 생각보다는 많은 빈자리가 눈에 뛴다. 기내에서 주는 소시지 빵 하나 먹고
조간 신문을 다 읽을 려고하니 바로 일본 땅 위라한다 .
비행기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비행 경로가 과거와 달라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나고야에 비행장이 새로 하나 더 만들어졌다한다 .
착륙하려고 하는데 공황이 바다위라 그런지 돌풍이 부는데 흔들림이 매우 심하다 .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며 한 순간 불안도했으나 무사히 착륙한다.
새로 생긴 공황은 중부 나고야 공황이라며 바다위를 메워 새로 크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거의 나고야 비행장 보다 5-6배 쯤이나 크다고 한다 .

입국심사를 하는데
과거에 한줄 뿐이여던 외국인 심사 줄에 서면 1시간 이상 걸렸었는데
관광 경쟁력을 위해서인지 하나 뿐이던 외국인 입국 심사대의 수도 많아지고 ,
또 일일히 따지는 것이 적어졌는지 이번엔 10분도 채 안 걸려 입국 심사대를 통과시켜준다 .
심사댈ㄹ 나와 짐 찾으러 가는데 방향 안내 표시판 위에는 일본어, 영어, 그리고
한글이 3번 째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데 기분이 묘하다 .
20년전에는 일본어 글을 하나하나 발음해보며 더듬듯이 읽어가며 길찿는데 애를 먹었는데
이번엔 한글이 길 안내 표시판위에 보란듯이 떡 쓰여져 있으니 정말 탱큐다 .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인을 유치하기 위한 작전인지 모르지만
한국 돈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

한글 표지만을 따라나서 인터넷에서 미리 연구해 온대로
뻐스를 타고 갈것인가 ? 새로 만든 기차를 타고 갈 것인가?를 망서리다
짐을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마눌의 뜻에 따라 하는 수 없이 공황버스를 타기로 했다 .
차비는 도심까지 버스로는 40분거리로 일인당 1200엔 하던 것을 기차비 850+300엔 과의
경쟁 때문에 1000엔으로 다시 내렸다고 한다 .
한국돈으로 치면 8000원 가량이고 기차를 타고가면 850엔으로 더 빠르고 싸다고 한다 .
교통비가 특히 비싼 일본에서 그 정도라면 그리 비싸게 든것은 아니다 .
공황버스를 타니 40분 후에 나고야 도심의 나고야 역에 내려준다 .
예약 한 숙소가 있는 사카에까지는 뻐스가 가지 않고 나고야 역까지만 간다고 하기에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사카에 있는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을 찿아가야만 했다 .

택시를 잡으려니 도로사정이 우리와 반대로 차는 좌측 동행 사람은 우측 통행으로
운전석 방향이 우리와 반대이다 ( 섬 나라인 일본과 영국이 그렇다)
손님이 타는곳도 우리와 반대쪽으로 타게 되어있는 것을 까맣게 잊고는
운전석 쪽으로 또 버릇처럼 차를 타려고 한다.
택시의 문, 역시도 자동으로 열고 닫게 되어있는 것을 모르고 손으로 열고 닫으려하니
고장이라도 날까 봐 운전사가 기겁을 한다.

택시에 올라 타니 운전수가 60세쯤 되는 노인이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 이름인 프레시드 호텔을 가자고 하니 발음이 문제였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
몇번을 이야기 해도 잘 모르는 것 같아
하는 수없이 인터넷으로 복사해 가지고간 호텔의 위치와 글자를 보여 주니
그제서야 “아 뿌래시도 ” 하면서 알겠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프레시드 발음이 안된다는 것을 내가 잠시 까먹었던것이다 .
택시 타고 가는 도중에 마침 라디오에서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하는 내용의 일본 방송이
심각하게 나오는데 한국에서 온 우리를 처다보는 운전사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진다 .
혹시 우리가 핵실험하겠다는 북한에서 온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이상한 눈치를 보여 재빨리
와다구시와 “부산가라 키타노데스(부산에서 왔습니다 )”라고 하니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얼굴이 밝아진다 .
아마도 핵 폭탄에 놀란 적 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핵 소리만 들어도 아주 민감해하는것만 같다 .

오후 5시 쯤 되어 호텔에 도착하니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한다 .
친절하게도 우산을 받쳐들은 운전사가 먼저 내려 택시 뒤에 실었던 우리 짐들을 일일이
다 내려주는데 기분이좋다 , 역시 이러한 친절 서비스는 일본이 제일 잘한다
예약한 호텔정문을 들어가는데 호텔은 중간 크기의 호텔로 일층에는 스타벅스 커피점이 들어있고 로비는 2층에 있어 입구를 찾기가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
일층에서 에레베이터를 타고 2층 로비에 들어서니, 여직원이 일본 특유의 친절한 인사로 대한다 .
그사이 일본말을 많이 잊어버려 예약한 방을 달라고 일본말로 해보는데 대화가 잘 안 통하는
것 같아 영어로 하니 더 더욱 안 통하는 것이다
그레서 집에서 복사해서 가져간 인터넷 복사한 예약증을 꺼내 보여 주니 , 그제서야 알아보며
웃으면서 예약된 방의 키를 내어준다 .
호텔방에 들어서니 작은 더블 침대 하나와 , 테이불 하나 만으로도 공간이 꽉 차서
사람마저 들어서니 거의 움직이기가 힘이 들 정도로 좁아서 답답하기가 그지 없지만
일본의 호텔이란 본디 다 그러려니 체념하고는 짐을 푼다 .

짐을 풀어 대충 챙겨 넣고는
저녁 8시에 일본 안과의사부부와 식사 약속이 되어있는 힐톤 호텔로 갈 준비를 한다 .
위치를 잘 모르니 택시를 탈수 밖에 없다 .
과거 일본의 택시비는 공포를 느낄 만큼 비쌋다는 기억에 교통비가 얼마나 나 올지
불안하기도 했으나 우리 호텔로 부터 가야할 힐톤호텔까지 10분 거리임을 알고는 안심한다 .

과거에 나고야 대학 유학시절에 의국원이였던 일본 의사 부부가, 만나기로 약속했던
힐톤 호텔 로비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
처음으로 대하는 집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고는
그들이 미리 우리를 위해 저녁식사를 예약해놓았다는 호텔 내의 일본식 정통 스시바로 들어서는데 입구의 메뉴 판을 언뜻 살펴 보니 일인당 14000엔이라고 써 있었다 .
마음속으로 4명에 14000엔 이라면.
술값과 서비스 차지까지 합치면 하루 저녁에 거의 60만원이란 금액이다.
신세를 너무 지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 그저 눈 딱 감고는 먹어주기로 했다 .
맥주를 시작으로 하여 , 일본식 정종 에다 , 여러가지 스시들을 그자리에서 직접 만들어
내어준다 ..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거의 20년 전에 배우고 썼던 일본말이라 많이 잊어버려서 대화의 반은 영어를 섞어야만 했으나
전공분야와 일상대화이므로 서로의 대화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 교수의 와이프는 나고야에서 안과로 개업하고 있으며 ,안과 개업하고있는 자기 와이프의 수입이 안과 교수인 자기수입보다 3-4배나 된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렇치만 그의 와이프는 개업하고있는 의사 이기에 한번도 제대로 외국구경을 나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내밷으며 ,
직업이 없는 우리 마눌의 그런 생활이 자기가 동경하는 삶이라고 부러워한다 .
그 친구는 이미 2주전에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일본의 명의로 인터뷰 했었다고 동아일보을
본 적이 있느냐고 하며 자랑을 한다 .
그는 현재 일본에서 망막 수술분야에서 일년에 가장 수술을 많이 한 안과 교수로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와 나는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 질 정도가 되고 , 스시로 채운 배도
점점 불러온다 우리의 식사사 거의 끝나갈 때가 되니
10시도 채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스시를 만들어 계속 공급해 주던 요리사들이
슬슬 보따리를 싸며 마칠 준비를 한다.
우리와는 달리 호텔 내의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예약 된 사람만 손님으로 받고는, 그대로 끝을
내는 모양이다 .
부른배를 잡고 얼큰하게 취한체 스시바를 나와 호텔 로비에서 커피와 진 토닉을 다시 한잔
하잔다 . 이번 차값은 내가 내겠다고 나서는데 그가 또 한사코 손사레를 친다 .
하는 수 없이 내년에 기회가 되어 한국에 오면 만나보기로 약속하고는 헤어졌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11시다.
비행기를 탓던 하루가 피곤 했던지 좁은 침대에 눕자마자
배부르고 뜨등따시고 하니 술에 취한 체로 그대로 골아 떨어진다.



둘째날
아침을 먹기위해 나서니 호텔 부페에 아침식사는 준비 되어있지만 , 1000엔을 더 주고 미리 예약을 안 했기에 호텔 조식은 먹을 수가 없단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주위에 아침식사가 되는 곳을 찾아 나섰다 .
호텔 일층의 스타벅스에서도 커피 한잔과 도너스 한 개에 한국 돈으로 4000원 가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아침을 보기 위해 호텔을 나와 아침에 식사할 곳을 찾아보는데 문을 열어 놓은 곳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해장국 집 같은 곳들만 있지만 일본에는 아침 식사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여러가지가 준비되어있어 골라서 사 먹을 수가 있다.
깨끗한 인테리어로 장식된 카페 같은 곳에 들어서니 , 3-4개쯤의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 있다. 여기서도 여러가지 빵들과 커피가 준비되어있어 햄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에 4500원 가량한다 채 만원이 안들고 둘이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카페를 나와서 보니 , 바로 옆집은 건강식품이라며 야채 셀러드만을 파는 곳이 있고 ,그 옆에는 라멘을 파는 집들도 눈에 들어온다 .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양복에 넥타이를 메었는데 특이하게도 거의 90% 이상이 검은색의 양복을 입고있다.
그외 아주머니들도 깨끗이 차려 입고 출근을 하며 , 출근하는 젊은 여자 애들도 많다 .
그런데 젊은 여자들은 입고있는 옷들과 스타일이 그야말로 정말 가지각색이다
모두들 개성만을 강조해서인지 모르지만 긴부츠에 , 미백 처리한 것 같은 가부끼 흰 얼굴에, 머리는 이준기나 만화의 주인공 같은 갖가지 스타일들이 보이고 때론 끝을 알수 없는
짦은 미니 스컷트에 , 펑크 스타일의 의상으로 제멋대로 이다 .
미니스컷을 입은 채로 , 자전거위에 올라 타서 당당히 출근하는 젊은 여자들의 흰 허벅지들이 보이니 가끔은 눈길 둘 곳을 몰라 난감하기도한다 .

식사후 호텔에 들어가 간편한 복장을 하고는, 아침부터 시내를 걸어서 돌아 다닌다
사카에 지하철 역에 도달하니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지하도에는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쏫아져
들어오니 길을 헤쳐갈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
20년전 엔 이 아침의 지하도에는 머릿맡에 맥주 깡통 하나와 마일드 세븐 담배갑을 머리맡에 두고 신문지를 덥고자던 ,하루 일해 벌어, 일주일을 놀고 먹던 거리의 노숙자들이 가득찼었는데
이번엔 그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아주 없어진 것인지? 다른 곳으로 수용이 되어버렸는지는 알수가 없다 .

지하상가의 아침 10시 가랑이 되니 지하도 상점들의 문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한다 . .
10시 정각에 문을 여는 백화점 입구에는 문 열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몇몇이 보인다 .
과거에 종종 지하 식품부에 들어가 시제품을 조금싹 얻어먹으며 배를 채우기도 했던 미찌코시
백화점이 눈앞에 보인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홀로 쓴 웃음을 지우며 지하도가 통해있는 미스꼬시 백화점으로 들어서서
지하 식품부로 내려가 혹시나 얻어먹을 것이 있는지를 살피는데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맛을 도록 준비 해놓은곳이 하나도 없어 실망(?)을 한다 .
지하부터 차례로 위로 올라가며 눈 쇼핑을 하는데 고급스러운 상품들이 많이 진열 되어있다 .
가격표는 과거와 그대로인 것 같은데 환율이 떨어져서 그런지 과거에 그토록 놀랬던 엄청난 정도의 가격들은 아닌 것 같다 . 과거에도 제일 윗에 층에서는 가끔 세일 품목들을 팔기도해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갔으나 때가 때인지라 세일하는 곳이 없다 .
그러나 다행이도 마침 제일 윗층에서는 북해도 자방 특산물전이 열리고 있다
백화점에서 지방특산물전을 열어주어 지방 상인들도 살려주고,
자기들도 손님들을 유치하는 공생공사의 작전인가 보다.
지방특산물전에는 물건들이 특산물이라 평소에 잘 볼수 없는 것들이고 또한 가격이 싸기에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마치 우리의 자갈치 시장같이 북적인다
주로 먹는 것들을 팔고 있다
시계를 보니 어느 듯 점심때라
무조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긴 줄 뒤에 가서 줄을 섯는데 , 줄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배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니 줄이 제일 짦은 곳으로 옮겨갔다 .
1500엔 짜리 북해도산 회덥 밥 한그릇을 사서 마눌과 둘이서 나누어 먹는데,
그 안에는 성게 , 게살 , 연어 알 , 사시미 등도 듬뿍 들어있는데
일인분을 둘이서 같이 나누어 먹어도 다 못 먹을 지경이다.
일본 음식은 우리 음식보다 대체로 좀 더 달다는 느낌이다 .

오후엔 거리 拘경을 나섰다 .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는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 일본사람은 남자나 젊은 여자나 아무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녔는데 오늘 와서 보니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
이상해서 담배를 피려고 하다가 주위를 살피는 순간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이 보이질 않아 무슨 일이 있을리라 짐작하고는 담배자판기 옆에만 재떨이가 놓여있고 그 주위 벽에는 붉은 글자로 금지된 이 거리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은 벌금 2000엔에 처함이란 글귀가 명확히 새겨져 있다
역시 법이란 것은 한번 만들면 벌금이 무서워서라도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 인가보다 .
준법 정신에 투철한 일본인들은 잘 지키는 것 같다 .
나는 슬며시 뽑아 들었던 담배가치를 다시 담배갑 안으로 밀어 넣는다 .
담장이로 쌓여진 외관에 어울리게 멋지게 지어진 이태리 식당 앞에 그려진 메뉴판에는 정통 이태리 스파게티가 1500엔이니 만2천원가량으로 써있다 .
그러나 그런 스파게티 먹으려먄 우리나라에서는 2만5000원 이나 하는 곳 도 많던데 우리나라의 물가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

일본은 물가는 잃어버린 10년 때문에 , 20년 전하고 비교해서 거의 제자리 걸음이나
조금 올랐으니 그 동안 그들이 원가절감을 위해 얼마나 얼마나 피나는 노력에 해왔을까?
20년전 그때의 석유값은 20불이 였고, 지금은 60불 하니 물가는 적어도 2배 이상이 올랐어야하나 잃어버린 10년간을 극복하고 피나는 경쟁력으로 이겨낸 것이다 .
그당시 100엔은 600원 이고 지금은 800원이라지만 우리나라 물가는 20년 전에 비하면
과연 몇 배나 올랐을까 비교해보면 그만 정신이 아찔하다.
저녁이 되어
나고야의 명물인 기시면(국수)을 먹으려고 찾아 나섰다
뱅뱅 돌다 겨우 찾은 기시면 집에 서니 중년 부부 둘이서 하는 음식점이였다
김이 모락 모락 올라오는데 오징어 국물 냄새가 좁은 공간을 진동한다 .
이윽고 기시면을 가르치고 주문을 하는데 새우 튀김 한마리까지 넣어서 800엔 가량한다.
20년전 나고야 대학 병원 식당인 생교 조합에서 250엔 하던 것인데도 생활비가 모자라 아끼려고
30엔 아끼려고 튀김 새우 한마리 넣치 못해 억울해 했던 바로 그 기시면이다 .
그 당시도 시내에서의 기시면 값은 600엔 가량 했다 .
튀김 국물이 우러난 기시면 국물의 마지막 한방울 까지를 다 들여마시며 그 옛날에 돈이 모자라 새우 튀김하나를 같이 넣어 먹지 못하고 눈물로 생략했어야만 했던 그 가난한 시절에 대한 복수(?)를 맥주 한잔 까지 곁들여가며 기어코 하고말았다 .
식당을 나와 다시 북적거리는 전통 일본식 선술집을 찾아 나섰으나, 기시면 국물과 맥주 한병으로 다 차버린 나의 뱃속이 우리를 호텔로 되 돌아갈 것을 명한다 .



셋째날
어제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계속 되어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유학시절 지도 교수 였던 아와야 교수의 문병을 목적으로 나고야에 들어 왔는데 교수님께서는 은퇴후 몇 년전부터 치매를 걸려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여 가족들조차도 문병을 제한하고 계신다고하니 만나볼 수가 없다고하니 낙담한다 .
교수님 집에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받지 않고, 전화기엔 자동 응답기만이 돌아간다 .
그 교수님은 사시학회에선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가지신 분으로 세계소아사시 학회장 까지역임하셨고 공부하고 가르쳐 주는 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면에서 너무나 잘 대해 주었다 . 환자가 촌지로 담배 한 보루 가지고 오면 다른 사람을 모르게 살짝 불러 서
나의 손에 쥐어주기도하며 ,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꼭 챙겨 같이 자기 차에 태워간다
우리부부를 위해 친구인 개업의사에게 부탁하여 호텔 예약에서부터, 기사 딸린 벤츠차까지 내어주어 오까야마 관광을 시켜주기도 했던 인정많은 교수님이셨는데 .
이제는 아는 사람의 얼굴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시다고하니, 곁에서라도 한번 다시 볼수
조차도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다 .
결국 문병을 포기하고는 나고야의 추억을 되돌려보기 위해 아침부터 길을 나선다 .
우리가 힘들데 살았던 집 근처와 공원들을 찿아 나서려다 비 때문에 포기해버렸다 .
하루종일 지하를 떠 돌아 다니며 과거보다 훨씬 싸진 것 같은 물건 가격들에 놀라워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식당에 여유롭게 앉은 사람들이나, 물건사러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은퇴 후의 나이든 세대들로 보인다 , 아마도 일본도 이미 고령화 사회를 접어들은 것 같고 그들만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 처럼 보인다 .

나고야 역 주변
호텔에서 지하철 타고 또 하나의 중심가인 나고야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나 각자 작은 책자를 읽고있는 사람들이 많고 놀라운 것은 아무도 핸드폰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차내 어디서도 전화벨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다
공중 질서 지키는 것이 그들에겐 생활화되어 있는것 같다 ,
우리 지하철 내에서 들려오는 통화 소음 같은 것이 적어 없어 조금은 부끄러워 진다 .
특히 나고야의 경제 사정이 많이 좋아져 , 나고야 역주위로 크고 높은 빌딩들이 막 들어서는 중이라고한다 .그동안은 일본의 지진 때문에 건물들을 높이 못지었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인지 40층 이상이 되는 높은 빌딩들이 막 올라 서고 있다고한다 ..
한창 잘나가는 도요다 자동차 회사가 나고야 가까이 있고 그외 여러 큰 회사들이 나고야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경기가 훨씬 나아졌다고들 한다 .
그러니 3년 전에 불경기로 잠시 문을 닫았던 많은 호델들도 새로 문을 열 정도로
바야흐로 호황이 시작되었다 한다.
국가의 규제 철폐로 가격 경쟁력을 회복한 수 많은 공장들이 새로 돌아가고 , 또한 서비스업에도 사람들이 몰려 드니 모든 분야에서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에 비해 이태백이고 이구백이라는 말들로. 세계에서 유래없는 급속한 고령화 사회로
바뀌어가는 우리의 현 상황과 비교해보며 이번 일본 여행에서 정말 많은 것을 생각케한다
일본보다 국민 소득이 훨씬 못함에도 불구 하고, 거의 같은 수준의 내지는 어떤 것은 물가가 더 비싸다는 것이 한 눈에 보일 뿐아니라 상점들이 그렇게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들이 북작거림을 보며 파리 날리며 미래에 대한 확신조차 가지지 못하는 우리나라 상가나 식당들 신세나 산업 공동화의 시작으로 별다른 일자리를 찿을 수가 없게 되어가는 젊은이들도 늘어가고 , 힘든 일을 아에 시도 조차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만 간다면
그들의 방황과 더불어 이나라 경제 붕괴가 시작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


야스마 안과 부부와의 식사
저녁 7시 야스마 선생이 호텔로 픽업하러 왔는데 과거의 BMW 가 아니고, 도요다 차를 몰고 왔다 . 식사를 병원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 저녁예약을 했단다 .
호텔을 나와 부친 때부터 하던 물려 받아 계속하고 있는 자기 병원에 들러, 자기 와이프와 딸을 데리고 우리 부부까지 5명이서 호텔 지하의 정통 일본식 집을 갔다 .
들어가는 입구부터 일식 집 분위기로 꾸민집으로, 기모노를 입은 나이든 아줌마상이 나와 맞이한다 .
자리에 앉으니 오늘의 코스라며 한지에 적어놓은 식사 메뉴를 각자에게 나누어 준다
15가지,음식이 나오는 순서대로 적혀져있는데 대부분 한자로 되어있어 송이나 ,새우 , 닭, 돼지고기 들은 알아 볼 수가 있는데 생선 이름이나 야채 들의 이름은 알아 볼 수가 없다.
처음에 앉자 마자 오랜 친구처럼 맥주3병과 함께 일본 정종으로 시작한다.
술이 좀 싱거웠는지 진로 소주를 시키긴다 .과거 20년 전에 일본에서 나와 같이 마셨던 진로 소주가 문득 생각이 난 모양이다 난 그때 일본에서 마시는 한국 술이라고 막 마시다가 반 쯤 업혀서 나온 기억이 있어 술 주문을 말리려는데 다행히도 주인도 진로소주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한다 .
그는 애가 3명으로 장남은 이미 대를 이을 안과 의사가 되어있고 밑에 여자 애 둘도 나고야
의과대학을 다니며 한명은 지금 하버드 대학에 교환 연수 중이라고 한다 .
우리 마눌이 많은 애들을 하나 같이 잘 키웠다고 조금 부러워 하는 눈치를 보인다 .
2시간의 식사와 한잔의 술을 걸치고는 20 년만의 해후하는 가족 기념 사진을 찍고는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

넷째날 집에 돌아오는 날
아침부터 짐을 싸고는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나고야 역으로 갔다
갈 때도 짐을 들고 오르락 내리락 하기가 싫다고 직행 버스를 타려고 했다
공황으로 가는 직통 기차를 타려고 해도 생긴지가 일년 밖에 되지 않아 운전사들도 잘 모른다.
빠른 기차를 포기한체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시간표에 보니 막 버스가 출발했고 30분 가량 기다려야 새로 버스가 온다고 적혀져 있다 . 시간을 보니 조금은 여유가 있는 것 같아 공황가는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안 온다 .
시간 하나는 정말 잘 지키는 일본 사람들인데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리라 생각하며
기다리긴 하는데 오기로 한 시간이 20분이 지나니 비행기를 못탈가봐 점점 초조해진다 .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미리 전날에 예약을 하라고 했지만 , 예약을 안 해도 탈 수는 있다고 하기에 예약 없이 나왔는데 , 시간이 점점 지나니 비행기를 못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진다 .
빌려간 핸드폰으로 일본 버스 회사로 전화를 했다. 안내원이 받아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를 빠르게 설명을 하니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어 마침 옆에서 우리와 같은 공황을 가야 하는 일본인
머리를 빡빡 밀은, 밀본스님모양으니 중년부인에게 전화를 대어 주며 무슨일인지 를 알아달라고
했다 .
잔화 내용을 전해주는데 고속도로에 사고가 나서 버스 운행이 중단 되었으니 기차를 타고 공황으로 가라고 지시를 해준다 .
만약 전화를 안 해 보고 그대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면 정말 난감 할 뻔 했다 .
부리나게 짐을 챙겨들고는 일본인 부인을 따라 기차를 타러가는데 거의 10분을 걸어 헤멘다 .
기차역에 도착하니 바로 5분후에 출발하는 기차표가 남아 있다고한다
표와 좌석권을 함게 사서 기차에 올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공황까지는 기차로 한 30분 가량 걸렸다 .
나고야 중부 공황에 들어서니 공황은 큰 쇼핑몰과 같이 지어져 있다
건물안에 다시 일본식 건물 모양으로 지어진 상점들이 있고,
온천과 사우나와 식사가 함께 가능한 건물도 공항내 건물안에 건물의 형태로 지어져있다.
식당가는 물론 작은 선물을 살수 있는 곳도 있고 특이하게도 동남아 인도나 실론, 이란등의 아시아의 작은 소품 가게들도 들어있다 . 여행객의 남은 돈마저 몽땅 훌터 가려고 하는 것 같다 .
국제선이나 국내선 손님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 모든 상점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드디어 KAL과 연계된 일본 JAL 비행기에 올라타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끝으로
이번 일본 여행으로 느낀 것은 20년 전에 비해 원화 가치가 너무 높아져 물가가 많이 싸졌다는 것이다 그런 물가만으로 두나라의 국가간 경쟁력을 비교해볼 때 우리들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수출되던것이, 남는것이 없어지니,한국은 수출을 포기하고 문을 닫게되고 하는 수 없는 일본은 자기네 나라에서 자체 생산하는것이 더 비용이 적게드니
그동안 문을 닫았던 공장들을 새로 가동하니 그들의 일자리는 어느 한곳 없이 늘어가고
그동안 애써 일본에 개척했던 바이어들 마져, 더 싼 중국으로 가려고 하고 .
한국의 공장들은 비싼 인건비나 , 환율 때문에 수출 경쟁력을 잃고 문을 닫아야만 한다.
일 할 공장이 없어져, 일자리 없어지니, 젊은 백수들은 점점 더 늘어갈게고
벌지는 못하고 쓰기만 하는 사람이 늘어가니 정말 머리가 아파질게다 .
해마다 외국에까지 나가 데모를 일 삼는, 투쟁 외는 할 일이 없는지 전임 노조원조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외국공장들의 한국 상륙을 두렵게 만들어 일자리 창출이 안되고 .
해마다 임금은 높아는 지지만 , 한국 내 물가는 임금 상승보다 더 올라버리니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행위가 공장 문 만 닫게하고 경쟁력만 떨어트리는 일 일 뿐, 실 익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고함만 질어내대는 대기업 강성노조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목줄을 자기가 죄고 있다는 것을 애써 모른척한다

같은 돈을 가지고 한국에서 쓸 때 보다 일본에서 쓸 때가 더 가치가 더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넘어 갈지는 눈에 안봐도 비디오다 .

한국 손님들을 위해 일본은 이미 안내 간판까지도 한글로 다 적어 놓고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의 수 많은, 빈 상점이나 식당엔 어느 누가 와서 메워 줄 것이며,
손님 오길 기다리며 파리 채 휘날리며 . 뭐 같은 세월이야 하며 한탄 해야하는 일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 되어져야 할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본다 .






힘들었던 일본 나고야 연수생활의 (리바이블)

내나이 35세쯤 되어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년간간 일본 나고야 대학병원으로 연수를 갔었다 .
그 지난 연수 시절의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많은 아픈 환자들의 짜증과 계속되는 일들의 긴장 속에 매일 치이던 시절

훌훌 털어버리고 외국에서의 일년간의 연수 .
궁핍의 고통도 있었지만 ,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사람사는 재미도 있었다
아마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자유로웠던 황금기 였었다고나 할까 .
문득 문득 , 그 때의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자유로움이 가끔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제 다 커버린 아들들에게도
그 때 그 시절의 부모들의 이야기를 기억시켜 주고도 싶어서다



그 당시 만해도 외국연수를 나가기도 힘들었지만,
산업화를 위해서는 많은 외화들이 필요해 , 외화가 많이 부족 하던 시기였다
외국 연수 비용으로 들고 나갈 수 있는 금액에 대해서도 나라에서 엄격히 통제 하던 시절이였다 .

아마도 내기억으로는, 그 당시는
1인당 6개월 기준으로 3000불이 상한선으로 되어 그 이상의 돈은 가져 나갈 수가 없게 하였다 .

그당시 일본 엔화가 한창 올라갈 때이 라서, 한국 돈과의 환율은 약 6:1 이였으며
1 달러는 한 800원쯤 하지 않았나 한다 .

본디 고지식하기도 하고 하여 법은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인지라
나라에서 시키는 말은 꼭 지키려 노력하며 ,
내가 안 지키면 나라가 망할 줄 모른다하는 생각에만 가득 찬 모(?)범생이였으니 .
그 덕에 항상 쪽박을 찰 때가 많기는 했지만
집사람과 둘이서 6개월 최대한도인 3천X2=6000불이니
1년이니 무려 12000불을 준비하여
네살박이 어린 작은놈만 하나를 데리고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고 용감하게도 (?) 일본 연수를 떠났다 .

내가 그 대학엔 처음가는 한국인이라 외국인 기숙사를 구하지를 못했다 , .
울며 겨자먹기로 한달 월세 5만엔 =30만원= 350불 X12=년 4200불을 제껴놓고나니
12000불 중 7천8백불이 남았는데 , 이렇게 남는 돈만으로
1년간을 버티어내야 하는데 그야말로 궁핍에 찌들린 극빈자 생활 그 자체였다 .

오죽햇으면
일본 지하철 역에 잠든 일본인 노숙자들 머릿 맡에 놓여잇는 기린 맥주캔을보며
나는 저것도 못 사서 먹는데 하며 부러워 하기조차도 할 정도였으니 .

처음에 월세로 집에 들어가니
전기와 수도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살림살이라고는 전기 밥통 하나와
집에서 가져온 등산용 코펠 하나가 전부로
주워온 신문지들을 다다미 위에다 죽 깔고는 그위에서 코펠 그릇에 밥을 먹어야 했다 .

하루는 세탁기가 없어 빨래가 너무 힘들다고 죽겟다고 불평하던 마눌이
어느날 밤 ,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다.
어제 아침에 보니 누가 내다 버린 것 같은 세탁기가 하나
공터에 놓여져 있던데 그 세탁기를 들고 들어 오자고 하며 , 잠든 나를 깨운 것이다 .
누가 볼까 봐 늦은 밤에 망 까지 보아가며
누가 내다 버린 세탁기를 끙끙거리며 들고 에레베이터에 실어 4층 단간방에 드려 놓고는
이윽고
전기 코드를 꼽으니 웅웅 소리가 나면서 슬슬 돌아가기 시작을 하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그 자리에서 땀에 흠뿍 젖은 옷들을 둘다
몽땅 벗어서느 세탁기속에 다 집어넣어 버리고는 기쁨에 … 말았다 .



정말 . 나고야의 여름은 무더웠다.
그 무더운 더위에도 좁은 방에 에어컨도 없었고 잇다해도 전기세 때문에 쓰지도 못했으리라
더위 죽을 지경이인데 , 음식물도 빨리 쉬어버리니 무었보다 냉장고가 무었보다 필요했다

우리 가진 돈에 새 것을 산다는 것은 생각 조차도 못하고
현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고하는 쓰레기 재활용 센터의 냉장고 하나를 얻어보려고
물어 물어 차비를 들이며 찾아 갔더니 ..
냉장고는 벌써 동이 났다며 기약없이 기다려 보라고 하는데..
하는 수 없어 돌아오는 길에 중고 전자 제품 도 파는 집에 들러
꼬불쳐 놓은, 피 같은 돈 무려 2만 8천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제일 작은 NEC 제품 냉장고를 , 신품으로 하나 샀다 .
그 냉장고가 바로 일본 내 우리 가졌던 재산 1호며,
동시에 마지막 1호 재산으로 등록되었다.
얼마나 좋았던지 그날부터는 매일같이 냉장고에 얼굴 들여 밀어 놓고는 더위를 식히거나
하루에 무려 3 번씩이나 얼음만 만들어내며 살았으니 .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딸랑거렸으면
아침에 병원으로 가기 전에 지갑을 열어보고 혹시 차비가 더 들어갈 일은 없는지
오늘의 점심 값은 얼마가 될까를 걱정되어 지갑을 확인을 하지 않고서는
집을 나서기가 웬지 불안해 할 지경으로 딸랑거렸으니 .

연수생이랍시고
하루종일 수술방. 병실을 눈치 껏 힘들게 뛰어 다니다 보면 배가 왜 그리도 빨리 고파지는지
150엔 짜리 컵라면을 빼
자판기에서 병원 복도의자에 홀로 앉아 , 훌훌 거리며 점심 때우기 다반사요 .
때로는 같이 근무하는
일본 젊은의사들과 식당에 더불어 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들을 따라나서는 경우는 항상 더치페이하니 점심값으로 무려 800-1500엔 정도가 들어가개된다 그러니 돈이 모자라서 같이 점심 못사먹겠다는 소리는 못하고
그저 음식이 입에 잘 안맞는다는등 이런저런 다른 핑계를 둘러대는 것도 한두번이지 .
나중에는 아예 점심시간 되기 전에 미리 혼자 나와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값이 가장 싸다는 생교식당이란 곳을 홀로 주로 이용했다 .

그곳 메뉴 중에는 나고야 기시면(일종의 우동)이 가격이 가장 싼데 한그릇에 250엔 하였다 .
(아마도 죽을 때 까지 그 가격을 내 기억속에서 안 사라질것이다 )
250엔짜리 기시면 우동 위에 튀김새우 하나를 더 얹어 먹으려먄
30엔이 더 들어가면 총 280엔이 된다 .
새우튀김 하나만 눈 딱 감고 넣으면 그 튀김에서 흘러 나오는 반지르르한 기름기가
우동물위로 살짝 뜨는데 그때 우동 국물 맛은 정말 기가 막힌다 .
게다가 부풀은 튀김 새우를 꼭꼭 씹으며 그래도 고기 냄새인데 맡아가며
기름기 뜬 우동 국물을 몽땅 들어 마시면
배도 불러오고 그야말로 황홀해지고 맛 또한 감칠 맛인데. 30엔을..
그 놈의 주머니 사정 때문에 30엔을 아낄려고
튀김 새우 두마리도 아닌 한마리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하며 내 우동 그릇안에 넣을 것이냐 ? 말 것이냐 ?
이것이 문제로다 고민 하며
오늘도 역시나 눈을 질끔 감고는
튀김접시 옆을 그냥 지나쳐야 했던 그 때의 그 심정은 … . 미련 곰땡이!!1


이제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면
나라가 제한 송금법을 열심히 지키기 위해서, 너무나도 고지식하게 , 때론 미련할 정도로
살았지만 지금은 소중한 가난을 체험하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
요사이 연수생들이 가지고 나가는 외화에 비교해 보면 상상을 초월해 기절할 정도겠지인
이나라 교수란 사람들 마저 나라법을 지키려 않는다면 누가 지키랴 하는 심정을
스스로 느끼가며 위안해가며 ,가난한 마음의 자존심을 지켜도 보았다 .
나중에는 물만 먹드라도 산다 하며
오기로 버티며 살았던것만 같다 .
반찬이라고는 김치 하나에 때론 고추장에 밥 비벼 먹거나, 미소시로국 하나로 몇일간을 버틴적도 있지만
언제부터 눈치 빠른 마눌 덕에
슈퍼가 끝나기 10분전 슈퍼에 가서 기다리면
고기나 생선값이 반에 반값으로 떨어진다는제 알아낸 마눌덕에
한 달에 한 두번쯤은 고기 반찬으로 영양도 보충하기도 하였다 .

주말 되면 가끔 식구 모두가 지하철 타고 나가 백화점 식료품 시식코너에 가서 잘 달라 붙으면
온 식구가 돈 안 들고도 일본 음식 맛도 보며 , 때론 배속까지도 채워질 때가 있다 .
처음엔 식구가 단체로 들러붙기가 미안해 시식 코너 갈때 마다 함번은 아빠 손에 , 한번은 엄마 손을 잡고 따로 방문하기도하며
나중에 같이 만나 집으로 돌아 오는 슬픈 이별의 맛보기 만행(?)도 여러차례 저지르기도 했다.
하도 자주 방문하다 보니 나중엔 얼굴을 아는 일본 사람도 생겨
멋 적어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애를 불러, 오히려 더 먹으라고 챙겨 주기까지도 하는 사람들도 생겼었으니 .
그런 거지 같은 궁상을 떨 지경이였으니
일본의 다른 문화 생활은 꿈도 못꾸고
그저 오로지 돈 안드는 머리속 채우기 경험 공부만 죽도록 하는 수 밖에

우리 옆집 503호에는 일본인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 마눌은 그 분들한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밤 늦은 전화를 일일이 다 챙겨 받아 주며
필요하면 자기집 전화를 언제든지 사용하라고도 하며
한겨울에는 추울까 봐 이불이며 안쓰는 전기 담요를 몽땅 꺼내 가져다 주기도 했으며
어쩌다 먹을 것이라도 들어오면 꼭 챙겨서 옆 우리집 문을 두들겨 나누어 먹자고 했으며
혹시 다른 일본 사람들과 말이 잘 안 통해서 곤란해 하면 ,언제든지 기꺼히 자기 일처럼
문열고 나오셔서 도와 주셨던 그 일본인 노부부의 그 인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귀국 5년 후에
우리 부부가 다시 일본 나고야에 들릴 기회가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노부부가 사시던 우리살던 앞집에 찿아 갔었지만
안타갑게도 오까야마로 이사를 갔다는 소리만 듣고 되 돌아서야만 했다.
우리가 돈이 없어 , 저녁 식사라도 한번 제대로 대접도 못해드리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훌러덩 한국으로 돌아왔던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나역시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에 있는 가난한 외국 노동자들의 심정이 나와 같을것으로 생각해
어쩌다 우리 병원에 그들이 오게 되면 정말 마음 편안하게 해주려 노력한다 .

시간이 지나면서 연수도 다 되어가고 하여
우리와 떨어져 할머니와 한국에 살고 있던 국민학교 1학년짜리 큰 아들놈들이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방학 때 불러들여 일주일 데리고 있는데

그때
돈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절실히 깨달았다 .

일본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한가족 동반 나들이로 나고야 있는 동물원을 구경 한번 나섰다.
갑자기 식구가 늘어 지하철 요금 4인분 , 입장권 4인분 ,
갑자기 4배나 드는 음식 값이며 , 정말 장난이 아니다 .

애들 둘이 같이 처음 모이니 서로 기가 살아나는 지
처음 보는 것이 모두들 신기한지 이것 저것 다 먹고 싶고 사달라고 졸라대는데
집으로 돌아 갈 차비는 남아있는지를 걱정해가며 이거 저것에 만지며
사달라고 조르는 애들을 , 눈까지 부라려 가며 달래야만 했던 그 참담한 심정 .

동물원에서는 구경 잘하고 나왔는데 결국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

지하철역 지하상가 아이스크림 집 앞을 지나는데 아이스크림과 과일이 유리잔에 함께
먹음직 하게 담겨진 것을 보고는 둘이서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아니하고는
그저 나만 빤히 처다 본다.
처다보니 가격표에는 무려 500엔이 적혀 있어 , 둘에게 하나씩 다 사주기엔
지하철 차비를 제하면 주머니 돈이 조금 모자랄것 같아 하나만 사서 서로 교대로
한번씩 갈라먹도록 했는데

이를 우짤고 !!!.

한번씩 서로 번갈아가며 빨아 먹다가 아이스크림이 녹으면서
반쯤 남은 아이스 그대로 그만 땅에 떨어져 버리고말았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작은놈은 땅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더니만
이내 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며 울고 불며 난리를 치고 싸움을 시작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처다 들보는데도 말리지도 못하고, 달래지도 못하고
그저 그들을 보고있던 나는 한편은 우섭기도 하고,
애들한데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

물론 돈을 더 가져 올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근검 절약 정신으로 살다 보니
그런대로 살만은 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미련 곰탱이 처럼일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비록 극빈자생활 일지언정 추억에 남는 연수 일년을 무사히 보냈다.

귀국시 재산 목록 1호 냉장고를 중고 집에 싼값에 넘기며 나 같은 사람한데 팔라고 부탁하며
정들었던 재산을 처분하고나니 그야말로 공수레 공수거라

애들은 먼저 보내고
부부 둘이서 귀국 짐을 싸서 귀국하는데 책 만 가득 든 큰 가방 두개 뿐이라
그것만 달랑 들고 들어오니 우리 세관에서 세관원 하는말
짐이 정말 이것 뿐이예요 하기에
나머지 짐은 모두 내 머릿속과 뱃속에다 몽땅 넣고 왔어요 하니 무사통과요 소리지른다 .
비록 힘들어 했으나 그래도 기억속엔 즐거웠던 나의 일본 연수는 이렇게 끝나 버렸다 .



이런 생활로 20년간을 대학병원교수로 있었는데
어느날 갑작이 의약분업을 시작하기위해 의사들을 코너로 밀어 넣기위해
리베이트 먹는 도둑놈으로 몰아대기 시작한다 .
그런 소리들이 너무나 싫고 명퇴가 아닌 황퇴를 선언하고 20년간 있었던 대학을 떠났다 ,
은퇴 후 받을 연금까지 타서 개업하는데다 다 밀어 넣고는 50 넘어 개업했다 .
개업을 하면 없는 사람들은 좀 싸게도 좀 도와주고, 있는 사람에게는 좀 울겨도 내며
여유롭게 진료하며 살 수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무슨 무슨 지켜야 할 법들이 그렇게 많은가 ?
이건 법이 아니라 간섭과 통제 그 자체이다
법 없이도 살거라고하며 살아 왔다고 자부하는데, 수 많은 간섭과 통제들은 비켜나
벗어 날 수도 없도록 매일같이 숨을 조이려든다 ....
의사이기 때문에 돈벌이에만 눈먼, 배 부른자로 분류가 되며
조금만 방심하면 컴퓨터 오 작동이나 , 시키는 대로 하지않았다면
부당청구질이나 해대는 도적놈으로 몰려야 하니 자존심마저 상해 서글픔만 더 커졌는데 ,
기다려 주어야할 세월은 기다려 주질 않고,
개업하느라 교육연금 마져 털어 먹어서 노후 은퇴 자금 조차도 준비가 안되있는데
은퇴 시기는 점점 더 나를 압박해오니 불안을 해지지만 인생이란 본디 그런것임을 ..


MBC '뉴스데스크'가 13일과 14일 이틀간 '집중취재' 코너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는 뉴욕, 도쿄와 서울의 물가를 비교한 뒤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고 보도하자, 뜻밖의 결과에 네티즌들이 놀라움과 분노를 표하고 있다.

'뉴스데스크'는 13일 3개 도시의 옷, 식품, 휘발유 등 생필품 가격을 비교해 보였다. 이 보도에 따르면 리바이스 503모델 최신 청바지는 뉴욕에서 4만6000원, 도쿄에서 8만4000원에 불과하지만 서울에서는 15만3000원에 팔고 있었다. 뉴욕의 3배, 도쿄의 2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맥도날드의 빅맥 세트메뉴는 뉴욕에서 5천원, 도쿄는 4650원, 서울 4400원으로 서울이 약간 저렴했지만, 스타벅스 커피값은 카페모카 큰 사이즈 기준으로 뉴욕 3900원, 도쿄 3700원, 서울 4800원으로 서울이 훨씬 비쌌다. 약 20 ̄30% 가량 차이가 나는 것. 에비앙 생수 역시 서울에서는 뉴욕 810원, 도쿄 800원에 비해 50%나 비싼 1200원에 팔리고 있다.

하기스 기저귀 60개 들이는 뉴욕에서 1만5800원이지만 서울에서는 2만6400원이었고, 생리대는 도쿄에서 44개까지라 3400원이지만 서울에서는 훨씬 적은 34개 들이가 7600원에 달했다.

자가용 운전자들이 민감해 할 휘발유값의 경우 서울에서는 1리터가 약 1540원이지만 뉴욕에서는 600원에 불과하고 도쿄도 1070원으로 서울보다 훨씬 저렴하다.

'뉴스데스크'와 인터뷰를 한 뉴욕 시민은 한국의 휘발유 가격을 듣고 나서 "한국 사람들이 불쌍하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고 말했고,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면 운전하겠나?'라는 질문에 "차라리 마차를 타고 다니지 운전은 못한다"고 답했다.

14일 방송에서도 '뉴스데스크'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린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의 가격 등을 비교하며 "생필품 뿐만 아니라 여가비용도 서울이 비싸다"고 전했다.

해리포터 책 1권이 뉴욕에서는 9300원, 도쿄에서는 1만2800원이었지만 서울에서는 7500원이었다. 그러나 이는 뉴욕이나 도쿄에서 파는 1권 분량을 4권으로 나누어 파는 것으로, 같은 분량을 사려면 3만원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뉴욕보다 3배가 넘게 비싼 셈이다.

또한 에릭 크랩튼 공연의 S석 관람료는 도쿄가 7만6000원이었지만 서울은 18만원으로 2배가 넘었으며, 회전초밥 역시 같은 종류 35접시를 먹는 가격이 도쿄 4만원, 서울 12만8000원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고급 수입화장품, 양주, 골프채 등도 마찬가지로 서울이 도쿄나 뉴욕보다 비쌌다.

2회에 걸쳐 서울과 뉴욕, 도쿄의 물가를 비교한 '뉴스데스크'는 "국민 소득을 고려하면 이미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에서 살고있다"며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보도에 네티즌들은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놀라움과 분노 등의 감정을 표출했다. "소득을 따져 보면 한국의 소비자들은 비교도 안되게 비싸게 물건을 사고있다" "식사보다 비싼 커피값은 한국에서만 통하는 얘기였나" 등의 의견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MBC '뉴스데스크'는 최근 기사 숫자를 줄이는 대신 심층보도 중심으로 내용상의 개편을 한 뒤 시청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으며, '매거진' '집중취재' 등의 코너가 눈길을 끌고 있다. [스타뉴스]


(펀글)
함정호의 경제

최근 들어 달러약세에 따른 원화강세 현상이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의 대외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달러약세는 사실상 달러에 고정되어 있는 위안화의 동반 약세를 가져와 중국과 경합하고 있는 우리 상품의 경쟁력을 크게 위협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화강세는 우리 경제에 분명한 위협이자 위기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원화약세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원화약세(환율상승)를 통한 수출확대가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장잠재력 확충에 여전히 효과적인 전략인지를 냉철하게 되짚어 보아야 할 때다.

환율변동이 투자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경제발전단계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 과거 산업화단계에서는 환율상승을 통해 수출을 촉진하는 한편 외자도입, 산업진입 허가, 관세환급 등 수출조건부 투자유인책을 제공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투자를 유발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역과 자본이 본격적으로 자유화되고 개방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이후 환율상승은 수요측면에서 수출의 양적 확대를 가져왔지만 자본재 수입비용과 외채원리금 상환부담의 증가를 초래함으로써 투자와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한편 공급측면에서는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과 수출을 촉진하기보다는 주로 가격경쟁력에 의존하는 범용기술제품 생산과 수출비중을 확대함으로써 교역조건, 고용 및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성장잠재력도 약화시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원화약세기의 수출내용을 보면 범용기술제품을 위주로 하고 있어 수출이 늘수록 자본재와 부품의 해외조달이 증가하는 한편 수출채산성도 악화되고 있다. 이는 독일과 일본이 통화강세기에 부품․소재산업부문에 지식을 축적하고 제품의 고부가가치화와 원가절감 노력을 통해 교역조건을 개선하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데 성공한 사례와 크게 대비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환율상승을 통한 수출확대는 더 이상 우리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한 유효한 전략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경제가 지식․서비스산업의 발전을 통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고 한층 더 높은 경제발전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원화약세 기조를 지양하고 환율을 기조적으로 안정화하는 것을 신중히 고려할 때가 되었다.

환율의 안정화는 먼저 자본재 수입비용을 줄임으로써 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아울러 기업들에게 품질의 고급화 등 비가격경쟁력을 제고하지 않고서는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식토록 함으로써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혁신 노력을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환율안정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고 투자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보완적 정책이 필요하다. 먼저 종래의 ‘수출주도 고도성장’에서 벗어나 ‘지식축적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우리 경제는 발전단계상 노동과 자본의 양적 투입증대와 조립․가공 중심의 제조업 수출확대만으로는 더 이상 1인당 소득을 증대시킬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앞으로 1인당 소득을 2만불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선진국에서와 같이 각 부문의 지식축적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필수적이다.

둘째, 환율의 급격한 하락은 수출위축과 이에 따른 제조업공동화 등의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환율의 기조적 안정화를 도모할 때는 제반 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예컨대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최종재 산업, 부품․소재 산업, 그리고 경쟁 및 보완적 산업이 일정 지역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는 소위 산업군집이 조성되도록 기업여건을 개선하는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셋째, 환율안정이 외채의존도를 과도하게 높이는 것을 방지하고 기술력이 높은 기업에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도록 외환 및 자본시장의 기능을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외환시장의 기능발전을 위해서는 환율이 기조적으로 안정되는 가운데 환율 자체는 외환수급에 따라 시장에서 신축적으로 변동하도록 함으로써 리스크 헤지 수요가 커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현재의 달러화 약세에 따른 원화강세를 위협으로만 인식하기보다 기업체질 강화와 성장잠재력 확충을 통해 우리 경제가 한층 더 높은 발전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계기로 삼는 슬기와 용기가 필요하다. 새 정부는 환율안정과 보완 정책 추진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이것이 다시 환율 안정에 기여하는 선순환의 성장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바란다.(매일경제, 20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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